2026-2-1 “부끄러워 떠난 사람들, 부지런히 찾는 한 사람” (딤후 1:15-18)

모든 사람이 등을 돌릴 때, 당신을 찾아낼 단 한 사람의 힘

1. ‘눈동자 색’이 바꾼 아이들의 운명

1968년, 미국의 초등교사 제인 엘리엇은 자신의 교실에서 아주 특별하고도 서늘한 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그녀는 아이들을 눈동자 색에 따라 두 그룹으로 나누었습니다. ‘푸른 눈’의 아이들에게는 우월하다는 정의를, ‘갈색 눈’의 아이들에게는 열등하다는 정의를 내린 뒤 갈색 눈 아이들에게만 식별 가능한 띠를 목에 걸게 했습니다.

결과는 즉각적이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단짝이었던 아이들이 단지 눈동자 색과 목에 두른 띠 하나 때문에 서로를 괴롭히고 따돌리기 시작했습니다. 갈색 눈의 아이들은 스스로를 무능하다고 믿기 시작했고, 실제로 성적까지 곤두박질쳤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낙인(Stigma)’**이라 부릅니다. 아주 사소한 기준 하나가 사람 사이를 단절시키고 한 인간의 자아를 무너뜨린 것입니다.

우리가 타인에게 붙이는 ‘라벨’은 이처럼 그 사람과의 거리를 결정짓는 강력한 힘을 가집니다. 그리고 이 낙인의 공포는 2천 년 전 로마의 차가운 지하 감옥에서도 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2. 낙인이 찍힌 사도: 영웅의 뒷모습은 생각보다 춥다

서기 66~67년경, 로마의 지하 감옥에는 한 노인이 갇혀 있었습니다.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당시 그는 우리가 기억하는 영광스러운 전도자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네로 황제가 로마 대화재의 책임을 기독교인들에게 전가하면서, 바울은 ‘방화범’이자 ‘로마의 적’이라는 치명적인 낙인이 찍힌 사형수였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맹수의 먹이가 되거나 몸에 기름이 뿌려진 채 ‘인간 횃불’이 되어 밤을 밝히는 도구로 쓰였습니다. 그런 바울을 찾아간다는 것은 곧 “나도 인간 횃불이 되겠다”는 선언과도 같았습니다. 사슬에 매인 바울의 곁은 그 어느 때보다 춥고 위험했으며, 그를 아는 척하는 것조차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3. ‘부끄러움’이라는 이름의 외면: 부겔로와 허모게네

바울의 사역 중심지였던 아시아(에베소 등)의 수많은 성도와 지도자들은 이 위기의 순간에 바울을 떠났습니다. 성경은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렸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문자 그대로의 모든 인원이라기보다 대다수의 성도와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이 그를 외면했음을 의미합니다.

특히 바울은 ‘부겔로’와 ‘허모게네’라는 실명을 언급합니다. 이들은 바울이 끝까지 곁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던 유력한 조력자들이었기에 그 상실감은 더욱 컸을 것입니다. 성경은 그들이 떠난 이유를 ‘부끄러움(에파이스킨테)’ 때문이라고 기록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감정적인 수치심을 넘어 **’거부, 기피, 외면’**이라는 능동적인 선택을 뜻합니다. 낙인찍힌 자와 엮여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마음, 그를 아는 척하는 것이 내 삶에 방해가 될까 봐 고개를 돌리는 차가운 방관입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고난당한 이웃을 대할 때 흔히 보이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4. “오늘도 오네, 내일도 오네”: 오네시보로가 보여준 ‘부지런한 사랑’

모든 이가 낙인을 두려워하며 외면할 때, 바울을 찾아낸 단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네시보로’입니다. 그의 이름은 한국어로 “오늘도 오네, 내일도 오네”라는 농담 섞인 언어유희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실제로 그는 그 이름의 뜻처럼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간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타인이 찍은 낙인을 보지 않고 사슬 너머의 ‘사람 바울’을 보았습니다.

“원하건대 주께서 오네시브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그가 나를 자주 격려해 주고 내가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와 만났음이라” (디모데후서 1:16-17)

오네시보로는 바울의 ‘영적 호흡’이 되어주었습니다. 숨 막히는 지하 감옥에서 고립되어 가던 바울의 신앙 심장이 다시 뛸 수 있도록,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한 영혼의 멈춰가는 신앙 맥박을 다시 뛰게 하는 것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부끄러워하지 않고 곁을 지켜주는 구체적인 방문이었습니다.

5. 1,600km의 거리도 막지 못한 절실함: 인간 바울의 고독

바울은 디모데에게 “겨울 전에 어서 오라”고 간곡히 부탁하며 가보의 집에 두고 온 겉옷을 가져와 달라고 말합니다. 에베소에서 로마까지는 약 1,600km, 당시로서는 수개월이 걸리는 험난한 여정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대한 사도의 뒷모습에 가려진 ‘인간 바울’의 민낯을 봅니다. 수차례 매를 맞고 파선을 당하며 복음의 기적을 일구었던 ‘사도 중의 사도’였지만, 죽음을 앞둔 차가운 감옥 안에서는 떨리는 몸을 덮어줄 겉옷 한 벌과 자신을 찾아와 줄 누군가의 온기가 너무나 절실했던 연약한 인간이었습니다. 1,600km라는 거리를 뛰어넘어 자신을 찾아와 줄 한 사람을 기다리는 그의 모습은, 진정한 관계란 화려한 성공의 자리가 아닌 가장 춥고 고독한 현장에서 증명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6. 마지막 질문: 당신의 ‘방문 리스트’에는 누가 있습니까?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 비유에서 주님은 천국 백성을 가르는 기준을 명확히 제시하십니다. 그 기준은 대단한 업적이나 화려한 경력이 아닙니다.

  • 누가 더 큰 교회를 세웠는가? (X)
  • 누가 더 많은 종교적 지식을 가졌는가? (X)
  • 누가 옥에 갇힌 자를 찾아갔는가? (O)
  • 누가 소외되고 헐벗은 자의 곁을 지켰는가? (O)

주님은 지극히 작은 자 하나를 찾아간 그 발걸음을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기억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인생 마지막 페이지에 기록될 질문은 “무엇을 이루었는가”가 아니라 “누구를 찾아갔는가”가 될 것입니다.

결론: 누군가의 오네시보로로 산다는 것

우리가 사는 이 시대도 여전히 누군가에게 낙인을 찍고, 부끄러워하며 등을 돌리는 ‘로마의 감옥’과 같습니다. 성공한 이들의 곁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지만, 실패하고 소외된 이들의 곁은 차갑게 비워집니다.

우리가 오네시보로처럼 살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옵니까?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먼저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주께서 우리를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셨다(히브리서 2:11)”**고 선언합니다. 우리 삶의 부끄러운 얼룩과 낙인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찾아오셨기에, 우리 또한 누군가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찾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오네시보로처럼 산다는 것은 세상이 기피하는 이들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찾아가는 사랑의 부지런함을 의미합니다. 오늘도 우리 주변에는 누군가의 따뜻한 방문을 기다리며 신앙의 맥박이 잦아드는 영혼들이 있습니다.

오늘 당신은 누군가의 멈춘 신앙 맥박을 다시 뛰게 할 그 한 사람이 될 준비가 되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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